작년에 지원했다가 나름의 사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던 영어통역알바가 있었는데, 올해 다시 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PlayX4라는 게임 전시회를 자기네가 다시 주최하게 되었는데, 영어 통역에 참가할 생각이 있으면 회신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내심 해보고 싶은 알바였는데 잘됐다 싶어서 얼른 신청했다. 다행히 따로 면접을 보거나 하는 것은 없었고, 간단하게 이력서 한 장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장소였다. PlayX4 전시회가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데, 우리 집은 남양주다. 가는데만 2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다. 자가용을 끌고 가면 1시간 내로 끊을 수 있지만, 내가 차가 어디있냐며... 무엇보다 장농면허라 차가 있어도 못끌고 간다.
일정은 교육까지 포함해서 3일간 진행되었다. 첫 날은 간단하게 교육을 받고 그 후 이틀동안 영어통역알바를 하는 것이었다. 일산이 워낙 머니 왕복하는데 드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처음부터 짐을 좀 싸들고 가서 3일간은 킨텍스 근처 찜질방 등에서 숙박하는 계획을 세웠다.
PlayX4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열리고, 영어통역알바는 목요일과 금요일에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사전교육 때문에 수요일부터 일산에 있어야했다. 교육이 1시부터 시작이라 12시쯤 일산역에 도착해서 부랴부랴 킨텍스로 향했다. 저 멀리부터 PlayX4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밥을 킨텍스 내 푸드코트나 식당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는데, 큰 실수였다. 가격이 정말 만만치 않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돈 벌러 왔다가 돈 더 쓰고 가게 생길 판이었다. 그리고 딱히 먹을만한 식당도 없었다. 돈 아끼자는 심정으로 킨텍스 1층에 있는 도넛 가게에서 도넛 하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점심 삼아 먹었다.
1시가 다 되어 가는데 어째 사람들도 안보이고 해서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전시홀 안쪽으로 안내해줬다. 가보니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여자들이 더 많은 것 같았고, 중간중간 아저씨 아줌마뻘 되보이는 어른들도 있었다. PlayX4가 이 정도의 통역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행사였나 싶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저 중에 절반 정도는 통역이 아닌 스탭에 지원한 사람들이었다. 통역 알바는 어림 짐작으로 40~5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교육은 1시가 제법 넘은 시점에 시작되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겨우 이정도 교육을 받으러 내가 남양주에서 일산까지 왔나 싶은 생각이 아주 모락모락 샘솟았다. 통역 알바가 할 일들을 말해주고 정말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뭐 심오한 교육이나 바이어와 의사소통 할 때의 방법이나 예절, 하다못해 간단한 외국어 몇 마디라도 알려주는 줄 알았다. 그런건 전혀 없었다. 정확히 재보지는 못했지만 교육 자체는 30분도 안 되어서 끝났을 거다. 다만 몇 가지 변동사항이 있어서 시간을 좀 더 잡아먹었다.
변동사항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원래 나는 중국 바이어를 담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중국 바이어가 일정을 갑자기 취소한 모양이다. 대신 한국 바이어를 맡게 되었다. 아니, 영어통역알바를 하러 왔는데 한국 바이어를 만나서 무슨 통역을 한단 말인가? 부스에 외국 기업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다 한국 기업이었다. 이젠 영어통역알바가 아니라 상담일지 작성 알바가 되어버린 것이다. 에, 뭐 그래도 어쩌겠는가. 바이어가 안오겠다고 하면 이쪽에서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아야 하는 것을. 그래도 혹시나 영어를 쓸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은 접을 수가 없었다.
교육은 세시 조금 넘어서 끝났는데, 아예 여기서 지낼 작정을 하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가기도 애매했다. 오랜만에 피씨방에 가서 집에서는 할 수 없는 게임들을 맛보았다. 똥3이라던가 와우라던가... 와우는 예전에 키웠던 캐릭터들이 싸그리 삭제되어서 좀 빡쳤다... -_- 그래도 오랫만에 새로 키우니까 재미는 있더라.
잠은 찜질방에서 자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결과 M모 찜질방이 그나마 괜찮은 것 같아서 밤 10시쯤 거기로 향했다. 가격은 8,000원. 내부는 인터넷에서 본 소개 페이지와는 사뭇 달랐지만 어차피 잠만 잘거 크게 상관 없었다. 씻고 나와서 핸드폰 충전을 하려했더니 콘센트가 없었다. 저 구석탱이 먼지 쌓인 곳에 하나 있길래 쭈구려 앉아 충전하면서 여친이랑 통화를 잠깐 했다. 수요일이라 라디오스타를 보고 싶었는데 아저씨들은 라디오스타를 안보나보다. 그냥 포기하고 수면실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았는데, 누운지 10분도 안되어서 옆자리 아저씨가 사람 다 죽여버릴 기세로 코를 골아대는 바람에 ㅅㅄㅂ거리면서 제일 구석탱이까지 기어들어가서 누웠다. 그런데 새벽에 사람들이 떼거지로 더 몰려오더니 아주 그냥 코골이로 한 편의 대서사시 교향곡을 써내려가는데 진짜 자다가 살인충동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세상에 코고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쪽잠을 자고 코고는 소리를 알람 삼아 일어나서 후딱 씻고 아침거리로 빵과 커피를 사서 킨텍스로 향했다. 킨텍스 앞 벤치에 앉아 아침을 대충 해결하며 결의(?)를 다졌다. 저 멀리 낯익은 그림이 하나 눈에 띄었다. 예전에 내가 게임 테스트를 맡았었던 게임... 뭔지 밝히지는 않겠다. 그닥 즐거운 기억은 아니니까.
전시홀로 들어가서 나눠주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을 기대했는데 그냥 흰색이었다. 때 잘타서 싫어하는 색이다. 뭐 조금만 흘리거나 묻혀도 티가 팍팍나는 흰색... 8시 20분쯤 바이어들이 도착한다고 해서 등록 부스 앞에서 다들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바이어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같이 호텔 버스를 타고 온다고 했으면 한꺼번에 들이닥쳐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한,두명씩 뜨문뜨문 나타났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통역알바를 맡은 인원들 몇 명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주최측 직원이 애타게 담당 번호를 외쳐보지만 몇몇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솔직히 미리미리 확인하고 대비하지 않은 주최측의 잘못이 매우 크다.
하여튼 그렇게 기다리는데, 내가 담당해야 할 한국인 바이어는 11시가 넘도록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를 않았다. 주최측 직원에게 물어봤지만 늦게 올 수도 있고 안올 수도 있다는, 꽤나 허탈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바이어가 11시 반까지 오지 않으면, 먼저 점심을 먹으러 가도 좋다고 했다. 같이 바이어 기다리던 어떤 (존칭으로서의)선생님과 함께 푸드코트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밥맛은 더럽게 없었다. 이걸 어제 8,000원 주고 먹었다면 인생의 잘못된 선택들 중 하나로 추가되었을 것이다. 공짜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며 먹었다만, 관광객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 같이 밥먹던 선생님은 바이어가 도착했다며 먼저 내려갔다. 나는 슬슬 내려와서 커피도 한 잔 사고 나름 여유있게 전시홀로 돌아왔다. 혹시나 해서 등록 부스에 내 담당 바이어가 왔냐고 물어보니, 왔다는 것이다.
...뭐라꼬예?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하필 내가 밥먹던 와중에 온 것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바이어는 이미 진즉부터 와서 전시홀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접선을 위해 바이어의 연락처를 문의했지만, 주최측에서 갖고있는 정보는 바이어의 회사 대표번호와 바이어의 이름 뿐이었다. 그 넓은 킨텍스 전시홀에서 바이어 이름을 외치며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회사에 전화해 봤지만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받지를 않았다. 전화는 1시 이후에 해보기로 하고 일단 B2C 섹션으로 구경이나 가기로 했다.
이번 PlayX4 전시회에는 VR 쪽 게임이 많이 나온 것 같았다. 여기 저기 대형 부스들이 설치되고 보기만해도 재밌어보이는 각종 장치와 기계들이 즐비했다. 나도 하고 싶었지만 스탭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눈팅만 했다.
나중에 집에 저런 거 하나 설치해놓고 하면 얼마나 재밌을까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처음에야 아주 재밌어 죽을 지경이겠지만 하루 이틀만 지나도 질릴게 뻔하다. 예전부터 내가 VR과 AR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역시나 낯익은 게임이 보인다. 다른 게임 회사에서 인수를 했는지 내가 알던 회사명이 아니었다.
한쪽에서는 길티기어 등 대전액션게임 코너에서 사람들이 열겜을 하고 있었다. 아는 형 생각이 나서 한 컷 찍어봤다.
이외에도 드론이나 오큘러스 같은 VR체험 기기, 그리고 장난감 판매 코너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와 개쩐다' 이정도의 '무언가'는 없어보였다.
1시가 되어 다시 바이어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째깍 받았다. PlayX4에 참가한 것이 맞는지, 그리고 여기에 온 직원 이름을 대면서 연락처를 물었더니 그건 직원 이름이 아니라 대표 이름이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걸 간신히 참고 여기 온 직원의 이름과 직급, 그리고 연락처를 얻어내서 결국 접선에 성공했다. 알고보니 이 바이어는 통역 및 상담일지 담당 알바가 한 명씩 붙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들은 바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주최측의 일 처리 능력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튼 바이어는 아침에 와서 이미 두 건의 상담을 했었고 나는 아주 완벽하게 그 상담을 놓쳤다. 따로 부탁하여 상담 내용을 대충 적었다. 오후에는 세 건의 상담 일정이 있었는데 마지막을 빼고 다 연속된 시간이라 열심히 쫓아다니며 상담 내용을 받아적었다. 영어로 했으면 꽤나 힘들었겠지만 죄다 한글이라 전혀 어렵지 않았다. 결국 내 입에서 영어는 단 한 글자도 나올 일이 없었다.
모든 상담 일정이 끝나고 바이어에게 물어보니, 내일은 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내일까지 통역 및 상담일지 작성 알바를 해야 하는데, 바이어가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된건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꽤나 많은 수의 통역알바들이 바이어가 안오거나, 오늘만 오고 내일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PlayX4의 목요일 일정이 모두 끝나고 주최측이 알바들을 모두 모아놓고 얘기하기를, 지금 온다고 해놓고 오지 않은 바이어들이 상당해서 자신들도 매우 당황스럽다, 내일 바이어가 오지 않는다고 한 분들은 내일 오지 않아도 좋다, 만약 오고 싶으면 와라, 대신 우리가 어떤 일을 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내일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고 7만원을 더 받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별 고민도 없이 통역알바는 오늘부로 끝내기로 했다. 일당은 행사가 다 끝나고 각자 문자나 이메일로 통장 사본 등을 받아 지급할 거라고 했다. 그냥 처음부터 갖고 오라고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영어통역알바는 처음이어서 기대도 많이 하고 걱정도 많이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얻은 것은 9만원이라는 돈밖에 없었다. 돈도 중요하지만 경험을 좀 더 쌓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단 1g도 없었다. 그냥 통역알바는 이런식으로 돌아가는 거구나 하는 느낌적인 느낌, 그리고 레벨 10짜리 야만용사와 언데드 도적 캐릭터만 얻었을 뿐이다. 실망한 부분이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도 또 영어통역알바로 지원할 것 같다. 대신 그 때는 이렇게 체계적이지 못하고 사람 힘만 빠지게 하는 그런 통역알바는 아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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